계절이 바뀌어 옷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 든 울 니트나 카디건 표면에 몽글몽글 뭉쳐 있는 거무튀튀한 보풀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드라이클리닝을 마친 뒤 정성껏 보관해 두었던 옷임에도 마찰이 잦은 팔꿈치나 옆구리 부위에 자잘한 털 뭉치가 들러붙어 있으면 원단의 본래 윤기와 단정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곤 합니다.
보풀을 억지로 손가락으로 뜯어내면 원단의 올이 울컥 딸려 나와 옷감에 잔상처가 남고, 힘이 강한 전동 보풀 제거기를 무작정 가져다 대면 순식간에 얇은 니트에 1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이 뚫리는 사고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며 손끝으로 터득한 원리는, 보풀 제거의 성패가 '원단의 두께에 맞는 도구 선택'과 '바닥면에 옷을 밀착시키는 밀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스탠드 조명이 아늑하게 켜진 밤, 거실 바닥에 다리미판을 널찍하게 펼쳐놓고 보풀이 엉킨 니트를 공중이 아닌 평평한 바닥에 딱 밀착시켜 놓습니다. 존스톤스 오브 엘긴(Johnstons of Elgin) 같은 얇고 민감한 캐시미어나 고급 울 소재 니트는 전동 제거기 대신 일회용 눈썹 칼을 비스듬히 눕혀 잡고 나뭇결을 다듬듯 결 따라 살살 긁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칼날을 눕혀 결 따라 슬슬 쓸어내리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원단을 괴롭히던 보풀 뭉치들이 툭툭 털어져 나갑니다. 옷감 손상 없이 표면이 부드럽게 정돈되며 그 아래 숨어있던 본래의 단정한 원단 결이 와닿을 때 기분 좋은 시각적·촉각적 정돈감이 밀려옵니다.

두툼한 모직 코트나 카디건의 경우에는 바닥에 옷을 평평하게 편 상태에서 전동 제거기를 가볍게 얹듯 지나가야 올 트임을 막을 수 있습니다.
보풀을 털어낸 후에는 영국 켄트(Kent)의 천연 모 패브릭 브러시를 가져와 위에서 아래로 원단 결을 가만히 빗어내려 잔털을 달래줍니다. 보풀은 결국 입고 다니는 동안 발생하는 정전기와 마찰로 인해 섬유 끝부분이 뭉치는 현상이므로, 세탁 시 정전기 방지제나 섬유유연제를 살짝 더하고 보관 시 옷걸이에 걸지 않은 채 접어서 서랍에 눕혀두는 수공업적 배려가 더해져야 옷의 수명이 비로소 연장됩니다.

다듬어진 옷감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려 보면, 지저분하게 얽힌 보풀을 털어내고 결을 바로잡는 이 소소한 수고가 거칠어졌던 마음의 결까지 다스려주는 다정한 시간이 되어줌을 깨닫게 됩니다.
옷감 표면에 뭉치는 보풀은 우리가 지난 계절 동안 부지런히 팔을 저으며 일하고, 타인과 스치고, 세상이라는 거친 벽에 마찰하며 살아왔다는 정직한 삶의 흔적입니다. 마음이 얽히고설켜 답답할 때 그 감정을 억지로 쥐어뜯으려 하면 마음의 올이 풀려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매끄러운 바닥에 옷을 바르게 펼치듯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비스듬한 손길로 보풀을 살살 패어내듯 감정의 찌꺼기들을 다독여 떼어낼 때 본래 가졌던 따스하고 매끄러운 결을 되찾게 됩니다.
보풀을 깔끔하게 털어내고 결을 바로잡은 니트를 예쁘게 접어 서랍장에 정갈하게 정렬해 둡니다. 손끝에 남은 부드럽고 뽀송뽀송한 촉감과 정돈된 옷가지가 자아내는 아늑한 풍경은, 무거웠던 하루 끝에 포근한 온기와 고요한 휴식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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